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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속의 흑인노예 제도 잔혹사

슈레딩거의 고양이 2017. 4. 27. 00:52

설탕 속의 흑인노예 제도 잔혹사



 누군가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다른 한 쪽에서는 그 특권을 떠받드는 비 특권 집단의 희생이 있음을 말해준다. 인종주의의 뿌리이며, 아직도 그 상처를 가지고 있는 노예제도는 인류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다. 고대의 생산을 담당한 노동계층은 노예였다. 노예들은 중세사회로 진입하며 보다 자유로운 농노가 되어 생산을 담당했다. 이러한 농노는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자본주의의 한 축인 노동자가 됐다.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 한 것이다. 하지만 유럽이외의 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는 노예제도가 다시 등장했다. 이들이 바로 흑인 노예들이었다. 흑인노예는 식민지 개척과 자본의 축적 과정 속에서 특권화 된 유럽 백인을 위해 노예화 되어 착취당했다. 흑인 노예들은 주로 설탕 생산에 투입되어 유럽에 달콤함을 공급했다. 따라서 본고는 인류의 지리상의 발견이후 등장한 흑인노예와 이들의 노동을 통해 생산된 설탕과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끝없는 착취

  - 다시 시작된 노예제

 고대 이래 노예는 특권층의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고대 로마의 경우 절정기에 시민 한 사람당 20명꼴의 노예가 존재 했었다. 로마제국의 화려함에는 노예의 끊임없는 노동이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절정기를 지나 차츰 줄어든 노예는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중세를 맞이하며 농노가 노예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노예보다는 훨씬 나은 존재들이었다. 일시적으로 사라져 가는 추세를 보였던 유럽의 노예제도는 지리상의 발견의 결과 식민지와 식민지 농장들이 생겨나면서 또 다시 되살아나게 된다. 절대주의 하에 각국의 국왕들은 식민지 건설을 위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식민지 개척의 선두주자였던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무참히 학살하며 노예화 했다. 하지만 인디오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새로운 천연두, 홍역, 발진 티푸스 등의 질병으로 침략자 코르테스 이후 50년 만에 인구가 1/10수준으로 줄 정도로 면역력이 약했으며, 살아남은 이들도 사금 채취나 탄광 노동 등의 고댄 노동에 쉽게 죽어 갔다. 그래서 그들은 본토에서 백인 계약 노동자나 범죄자들을 데려와 식민지 개척에 활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백인노예의 활용은 자국의 노동력의 외부유출과, 훨씬 비용이 적게 드는 경제적인 이유로 흑인으로 대체됐다. 중상주의하의 자본의 축적 속에는 흑인의 아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 흑인은 상품이다-삼각무역

  아프리카의 흑인은 사람이 아닌 상품이 되어 서인도 제도로 유입됐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플랜테이션이 발달 할수록 노예매매는 번성하며, 무수히 많은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16세기에는 30만 명, 17세기에는 150만 명이 넘는 숫자가 아프리카에서 끌려 왔으며, 18세기에 들어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정착되며 노예매매는 절정을 이룬다. 유럽은 아메리카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기호품인 설탕, 담배, 설탕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열대작물들은 흑인노예들에 의해 재배, 상품화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식민지 산물들은 삼각무역이라 불리 우는 틀 속에서 움직였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생긴 삼각무역은 3단계를 거친다. 1단계는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흑인노예를 구하려 가는 것이다. 그곳의 족장에게 양털, 목화, 브랜디, 쇠막대, 통화약, 소총 등을 주고 노예를 구입한다. 2단계는 이렇게 구입한 노예를 배에 싣고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 판매한다. 3단계는 노예를 팔은 노예상인들은 화물칸에 사탕수수, 등의 열대작물을 가득 채우고 유럽으로 돌아와 판매했다. 이러한 삼각 무역을 통하여 유럽은 막대한 이익을 누렸으며, 자본을 축적한 것이다.  


 - 처절한 노예화의 과정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상품과 소외된 노동 속에서 자본가의 착취를 받는다’ 하였다. 이러한 노동자 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임금도 없이 짐승같이 취급을 받으며 착취를 당한 사람이 흑인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백인 노예상 들에 의해 노예시장에 매매되었다. 당시 이러한 노예매매는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부의 획득과 사회적 신분향상을 위한 최상의 수단으로 여겼다. 그들은 노예무역을 통해 야만의 흑인에게 문명을 접하게 한다는 논리를 펴며 합리화 했다. 

  노예무역을 위해 노예도매상은 선장을 중심으로 35~50 명 정도를 선발하여 대포로 무장된 노예선에 갖가지 상품을 싣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한 그들은 아프리카의 국왕과의 협상을 통해서 노예를 샀다. 노예들은 부족 간의 전쟁을 통해 포로로 잡혀와 흑인 중개상이나 아랍상인들에 의해서 노예시장에 끌려온 이들이었다. 중노동에 합당한 신체적 조건을 가진 흑인이 먼저 구매되었다. 3~6개월간의 거래를 통해서 노예선에 노예가 가득 차면 ‘중간항해’라 불리 우는 아메리카로의 공포의 뱃길에 오르게 됐다. 노예선 에서 흑인들의 처한 환경이란 참혹함 그 자체였다. 낙인, 쇠사슬에 묶인 그들은 벌거 벗긴채 최소의 공간 속에서 죽음의 항해를 감당해 내야 됐다. 450명 정원의 노예선에 600명씩을 채워 넣었으니 이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노예들도 많았다. 노예교역이 이루어지는 동안 대서양을 가로지른 1200만에서 1500만 명에 이르는 흑인들 가운데 150만에서 200만 명의 노예가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죽음의 항해에서 살아남은 흑인들은 아메리카의 노예시장에서 농장주들에게 팔린다. 살아남은 이들은 사탕수수, 목화, 인디고를 재배하는 대농장에서 고된 끊임없는 노동 속에 내몰린다.  


흰 설탕 검은 노동

달콤함에 중독 되다

  인류학자인 시드니 민츠에 의하면 ‘단맛을 불쾌한 것으로 거부한 사회는 단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단맛은 신체가 활동하는 데 중요한 에너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복합 탄수화물인 밀, 쌀, 고구마 등을 섭취를 통해 이들 속에 들어있는 녹말, 섬유질에서 열량을 내는 자당(蔗糖)을 이끌어 내는 소화 과정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 받는다. 그런데 설탕이 대량생산 되면서 사람들이 설탕을 많이 섭취하게 되었는데, 설탕은 그 자체가 거의 순수한 형태의 자당이므로 우리의 소화 기관은 다른 물질을 소화하려 하지 않고 설탕만을 더욱 자주 섭취하도록 길들여졌다. 이에 따라 우리의 신체는 혈당을 유지하려 더욱 자주 자당을 섭취해야 하는 것이다. 설탕은 강한 중독성을 지닌 것으로 잠재적 수요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맛은 16세기이후 근대의 플랜테이션을 통해 설탕이 대량으로 공급되기 이전까지 특권층의 소유물이었다. 

  유럽은 이슬람으로부터 사탕수수 재배를 받아 들였지만 설탕 생산량이 아주 적었기에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었고 희소했다. 즉 단맛에 대한 수요는 존재 했으나, 16세기 이전까지 유럽은 설탕 수요에 공급할 설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유럽의 자본가들은 서인도제도를 비롯한 아메리카의 열대기후에 사탕수수를 대량 재배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설탕이 흑인노예제를 통해 서인도 지역에서 대량 생산되자, 그 중독성을 통해서 식생활에 급속히 침투해 들어갔으며, 인류의 입맛과 몸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이러한 설탕이 특권층의 식탁에서 노동자의 필수품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설탕은 특권층 소수의 독점물이었고 대게는 의약품, 향신료, 또는 장식(전시)물로 사용되었다. 이는 플랜테이션을 통해 많은 자본을 투자한 자본가들이 중상주의 정책아래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가격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 흰 설탕의 검은 노동

  사탕수수의 재배와 정제를 통한 설탕 생산을 위해서는 고된 노역을 감내하는 노동력이 필수적이었다.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인 들은 새로운 작물을 실험하다 사탕수수 재배에 이르게 되었고, 사탕수수 재배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야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노예가 활용된 것이다.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탕수수의 수확, 으깨기, 고열을 감내해 가며 정제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담배, 면화 등의 다른 작물과 비교해도 고역이었다. 그러기에  흑인의 3/4가 사탕수수 재배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중상주의 아래 국가의 보호를 받는 플랜터들의 이익을 위해 노예의 삶으로 내몰린 것이다. 노예화된 흑인의 검은 노동을 통해 유럽 흰 설탕을 단 맛의 중심으로 가져 왔다. 


- 자본주의의 발달이 해방시키다

  중상주의 하에서 보호받는 플랜터들은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을 통해서 자리를 잃어갔다. 인도주의적인 이유보다는 경제적 이유로 노예제도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18세기말 산업혁명을 통해 일어난 새로운 세력인 공장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의 생산성 향상과 지임금 유지를 위해 곡물법, 설탕법등, 중상주의 하의 보호주의적인 법을 폐지시킨다. 자유무역을 역설한 그들이 플랜터들을 몰아세운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점점 낮아지는 삼각무역 특히 설탕무역의 이윤은 은행에서도 부담이었다. 또한 대륙봉쇄아래 프랑스를 중심으로 사탕수수를 대체하는 사탕무가 등장하며 플랜터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이러한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인도주의적 이유아래 흑인 노예는 해방을 맞이했다. 이렇듯 초기 자본주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설탕생산의 주역인 흑인노예는 자본주의의 발달 속에서 경제적 구조의 변화로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한 사실은 흑인들의 중노동을 통해서 대량 생산된 설탕은 또 다른 중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영양 공급원이 됐다. 이전의 노동자들에게는 수분과 열량 섭취를 위해 맥주와 같은 알콜 음료가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알콜 섭취는 산업화 되며 커가는 근대의 공장제 하에서 노동 강제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에 자본가는 커피 혹은 차에 설탕을 듬 북 쳐 제공 하였다. 설탕은 커피나, 차의 쓴맛을 중화 시켜 줄 뿐만 아니라 많은 노동에 필요한 열량을 제공해 주었다. 가격에 있어서도 맥주보다 싸게 먹혔다. 설탕은 신대륙의 노예들에 의해 생산되고 구대륙의 공장 노동자를 노예화시키는 기묘한 역할을 한 셈이다. 



  역사 이래 특권집단의 특권을 유지 하는 데는 많은 비특권 집단의 희생을 강요했다. 이러한 특권과 비특권의 착취구조는 역사를 통해 계속 돼왔다. 특히 비인간적인 특권의 절정은 노예제도일 것이다. 이러한 노예제도는 프랑스 혁명이후 인권이 강화 되면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라진다. 근대의 노예제도하에 무수히 많은 흑인들은 백인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생명을 잃어갔다. 아프리카의 많은 흑인들은 노예상인들에 의해 아메리카의 사탕수수재배를 위해 끌려갔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쉽게 접하는 설탕은  대략 16세기이전 까지는 너무나 귀한 것이었다. 오늘날 누구든지 손쉽게 접하는 단맛은 불과 몇 백 년 전만해도 특권의 상징이었다. 설탕이 식생활의 중요한 축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지리상의 발견이후의 노예제의 부활과 더불어 흑인들의 피를 통해 이뤄진 역사적 산물이었다. 이러한 달콤한 설탕의 이면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노동착취가 있었다. 유럽의 달콤함을 제공하기 위해 대가도 없는 끝없는 노동이 투입된 것이다. 달콤함에 매료된 백인에 의해 흑인이 철저하게 착취당했다. 또한 이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 들은 공장 노동자에게 설탕을 다량 함유한 차와 커피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생산의 효율을 더 높임과 동시에 노동자는 더 힘든 노동으로 빠져 들게 했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설탕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흑인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생산된 설탕을 통해 새로운 입맛과 몸은 새로운 현대의 질병에 노출되어 신음하는 하고 있다. 이는 인류의 죄악에 대한 심판처럼 느껴진다. 설탕은 우리에게 달콤함만을 가져다 준 것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의 첫 씨앗인 노예제와 새로운 입맛과 몸을 가져다 준 것이다.






■ 참고문헌

시드니 민츠, 『설탕과 권력』, 지호, 1998.

주경철,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문학과 지성사, 2004.

장 메이메,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시공사, 1998.

민석홍, 『서양사 개론』, 삼영사, 1997.

헨리 홉하우스,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세종서적, 1997

가와기타 미노루, 『설탕의 세계사』, 좋은책만들기,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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