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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이란? 역사왜곡

슈레딩거의 고양이 2017. 4. 23. 23:57

식민사관이란

 식민사관은 제국주의 일본이 완벽한 식민지 통치를 위한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근대적 역사 방법론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해석한 것을 말한다. 식민사관은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회 진화론적이며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논리로써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 하며, 피지배민족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한 역사관을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근대 역사방법론으로 장기간 인력동원을 통하여 한국의 역사를 정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 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역사연구를 한 것이다. 일제는 식민사관을 통해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일제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왜곡된 역사적 당위성을 만들려 했다. 이들의 역사연구는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구 열강은 문명화, 서구화, 근대화라는 이름아래 아시아적 정체성이론을 구축하여 자신들의 침략을 합리화 했다. 이러한 서구의 식민사관을 일본 제국주의도 똑같이 받아들여 자신들의 아시아 침략을 합리화 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성격

종속성과 침략성: 일본 제국주의는 종속성과 침략성을 동시에 띠고 있다. 종속성이란 일본도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화 될 뻔 했지만 당시 열강의 역학관계의 균형에 의해 모면하게 된다. 당시 그들은 네덜란드, 미국 등에 의해  침략의 기로를 여는 ‘수로측량’을 당했으며 무관세 무역 요구 등을 당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1860~70년대의 서구는 대륙 세력과 해양세력이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힘의 균형으로 인해 식민지화를 모면 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적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그들은 많은 열강들의 제국주의를 습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많은 번역서를 통해 근대 문물과 제국주의의 논리와 통치 방식을 연구했다. 서구의 식민지 경영을 배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 부은 것이다. 이러한 종속성 가운데, 자신들의 근대화를 위한 자본의 축적을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자체적인 부의 축적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할 수 없었기에 침략의 방법을 통해 자본의 축적을 이뤘다. 중세 봉건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많은 자본의 축적이 필요하다. 생산수단인 부의 원시적 축적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를 위한 자국 내의 기반이 빈약하기에 침략의 방법을 통해 식민지의 부를 자국으로 흡수하는 제국주의를 지향했다. 조선 수탈을 통해 자신들의 자본을 축적한 것이다. 한 예로 많은 조선의 쌀 수탈을 통해 자신들의 물가 안정에 기여했고, 자신들의 쌀은 높은 가격으로 동남아시아에 팔아 이익을 남기며 자본을 축적했다. 이를 보듯 일본은 위로부터 개혁인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통치체제를 세웠으며, 가난한 나라로써 부의 축적을 위해 제국주의 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조선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침략과, 가난한 후발 제국주의국가인 일본의 침략을 동시에 당하는 이중의 외압을 당했다.


일본의 조선관-일본의 식민사관의 흐름과 연구 단체

 일본은 임진왜란 후에도 여전히 나라를 유지하는 조선왕조가 유지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연구를 했다. 에도시대(1603~1867)의 일본 한학자들이 퇴계 이황의 주자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다. 그 중 국학자들은 자신들의 고서인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등의 고전 연구를 통하여 신국(神國)일본을 주장한다. 이들은 고서 연구를 통하여 일본이 태고 적부터 조선 땅을 지배해 왔음을 주장한다. 그들의 고서에 기술된 역사의 불연속면을 일본의 한반도 지배로 매꾸려 노력한다. 이를 임나일본부설이라 하는데, 이러한 그들의 논리가 에도 시대의 국학자들로부터 구체적 사관으로 체계화 된다. 명치시대에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이며 제국주의의 기틀을 제공한 유쿠자와 우키치는 탈아론을 주장한다. 세계열강의 특히 백인중심의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막기 위해 아시아가 단결해야 하며, 이런 중심에 일본이 있다는 주장이다. 조선식민을 합리화 하는 식민사관이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관은 랑케의 역사주의의 강한 영향아래 국가주의적인 사관을 내놓는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의 특징은 독일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러한 제국주의 침략의 합리화를 위한 학문적 성과를 내기위해 많은 단체를 결성하고 후원한다. 이러한 식민사관 연구기관에는 다음과 같다.

동경제국대학: 문헌고증주의를 내세우는 관학 아카데미. 학술기관이면서 국가 정책 수립함. 

만주철도주식회사 동경지사 내 지리역사 조사실: 철도는 식지지 수탈을 위해 필수적이다. 만선사관을 주장함.

조선사편수회: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반대해 식민사관을 반영한 조선사 37권 간행함. 

이외에도 경성제국대학, 청구학회를 들 수 있다. 이들 연구기관은 제국주의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통해 독일의 랑케의 역사주의 연구를 표방하며, 근대화된 역사방법론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제국주의를 합리화 하는 작업을 벌였다.


식민사학의 내용

이러한 그들의 식민사학은 어떤 내용인가? 일선 동조론, 타율성론, 정체성론 등 제국주의적이며, 사회진화론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 하는 역사관을 만들어 낸다.  특히, 고대로부터 일본의 지배를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통해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여 합리화 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 

일선 동조론(日蘚同祖論);기다 사다기치(喜田貞吉)은 역사지리 일한병합특집호(1910)에 한국은 태고 신대부터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일 병합으로 분가인 조선이 본가인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다. 

타율성론; 조선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외세의 압도적인 영향아래 형성되었기에 주체적인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먼저 만선사관으로 나타났다. 만선사관은 만주와 한반도가 하나라는 것이다. 일본이 만주병합을 합리화 하기위해 내세운 것이다. 역사적 뿌리를 하나로 만들어 한반도를 지배하듯 만주지역을 침략하기 위한 정지 작업을 위해 내세웠다.

반도적 성격론은 미진아 아키치데 가 『조선사 개론』에서 주장하는데, 조선은 반도적 성격으로 인해 숙명적으로 외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 주변성, 다린성으로 규정했다. 반도적 지리적 위치로 인해 항상 외부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에 주체적이 못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반도적 성격은 대외투쟁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외교관계, 국내 정치권 형성, 당벌성, 문화면에서도 나타나, 소위 사대주의라고 하는 성격을 형성케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민족이 북방의 무력에 의한 주의적 지배, 중국에 의해 사대적인 주지적 지배, 임나일본부에 의한 온정적인 주정적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임나일본부설 (남선 경영설) 

 임나일본부설은 고대시기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이남 지역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근거를 720년에 기록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 많은 논리적 모순이 존재한다. 일본이 우리를 지배했다면 그들의 지배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도 발견되어지지 않고 있다. 임나일본부란 기록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유일하게 나오는데 내용은 신공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임나에 일본가 설치되어 562년 신라에 의해 망할 때 까지 한반도 이남을 지배했다. 이러한 기록은 비슷한 시기의 기록된 고사기(古事記)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의 지배인데도 기록이 유일한 것이다. 일본서기는 7세기 중엽 천황의 권위가 확립된 후 천황 가를 미화하기 위해 기록된 사서이다. 따라서 대체로 5세기 이전의 기록은 신화적인 전설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일본이라는 명칭은 7세기에 나오는데 시기적으로 4세기에 일본부 라는 말이 성립하기 불가능하다. 기년(紀年)에도 상당한 조작이 가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신공황후가 임나를 정벌했다는 369년은 일본서기에는 24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120년의 오차가 있는데 이와 같은 오차는 시기가 올라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이렇듯 유일한 사료 하나로 주장하기에 논리가 부족한 그들은 자신들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한반도의 사료로 광개토왕비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다음의 비문의 기록을 통해 임나일본부가 실재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장수왕이  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고구려가 멸망 후 1200년 후 1889년 6월 ‘아세아 협회’라는 일본 관변단체가 기관지인 『회여록』제5집에 비의 존재를 알리고 비문을 실어 출간했다. 일선동조론 등 식민사관을 통해 침략의 합리화 작업을 하던 육군 참모본부에서 파견된 사코 카게노부에 의해 쌍구가묵본으로 제작된 사코본이 회여록에 실린 것이다. 일본은 비문의 신묘년(391)조 기사를 내세워 임나일본부의 실재를 광개토왕비가 증명해 주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보처럼 받든다. . 기사의 내용은 아래와 갔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羅,以爲臣民

해석: 백잔,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 임나,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위의 기사를 통해 임나일본부가 실재했다고 주장하며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 하는데 사용된다. 이러한 일본의 책략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비논리와 억지에 대해 반박한다.

1. 정인보설:1930년 위당 정인보가 기사의 해석을 문제 삼으며 나온다. 바다를 건너와 깨부쉈다(渡海破)는 비문 내용에서 ‘깨부순 주체가 일본의 해석처럼 왜가 아닌 고구려라고 해석해야 맞다 고 반론을 폈다. 광개토왕비가 고구려의 치세를 높이기 위한 것이니 왜의 주도적 묘사는 있을 수 없는 논리이다.

2. 비문 조작설(이진희) 강제인, 김달수: 재일 역사학자 이진희씨가 사상(思想) 5월호에 ‘광개토왕릉비문의 수수께끼’를 발표하여, 비문 탁본 조작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주장했다. 이러한 조작에 일제의 군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의혹이 있음을 최초로 제기하였다. 그는 군부에 의해 석회를 발라 조직적으로 비문이 조작되었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1984년 중국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장 왕건국이 “비문 변조는 없다”며 이진희의 조작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3. 민영규의 춘추필법: 연세대 동양사학과 민영규 교수는 ‘동방학지’ 기제를 통해 한문에는 어법이 있는데 도입과 결론에 맞는 한자가 사용되지 않음을 보고 위작 증거로 내세움.破자의 경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파괴할 때 쓰는 말임. 이를 통해 어법에 맞지 않는 일본 측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함.

4. 以란 존재의 불확실성: 야마토 정권만 왜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왜가 존재했다. 북방유목민족도 왜 큐슈도 왜라 불리움.

5. 김성호:『비류 백제 원류를 찾아서』를 통해 신공황후는 백제의 후손이었다라고 주장함.

백제가 두 갈래로 있었는데, 비류백제가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15대 일왕이 됐다는 설임.

6. 이병선:부산외대 일본어학과 교수인 이병선은 대마도의 모든 명칭에 임나가 나오는 것을 보아 대마도를 다스리기 위한 관청이라 주장함.

7. 김석형,박시형: 북한학자로서 삼국 분국설을 주장함. 고구려 백제 후손들이 일본에 국가를 형성했다는 설임.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제,가야,신라 등의 제국은 실은 조선제국으로부터  건너간 이주민이 건국했던 분국이라 주장함.

8. 김병기,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광개토왕릉비의 자체와, 서체를 비교 분석하여 상이한 점을 발견하여 일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함. 해석상에서도 일제가 臣民, 屬民의 차이를 잘못 이해했다고 봄.『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정체성론:낙후성론 

 한국의 사회경제 구조가 대단히 낙후 되어서 발달된 일본의 자본주의의 이식을 받아야 한다는 식민사관이다. 후쿠다 福田德三는 쉬물러가 언급한 경제발전단계를 한국사에 적용하여 정체성론을 펼친다. 1902년 여주, 이천, 방문하여 한국이 도시경제 단위 이전인 자급적 촌락경제 단위에 불과 했다고 주장했다. 어설픈 막스주의를 가지고 20세기 초 조선사회는 일본의 11세기에 비견되므로, 중세 봉건제 사회가 결여 되었다고 발표한다. 스스로 힘으로 근대사회로 이전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 되었다고 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스스로 불가능하기에 일본 자본주의를 이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카타四方博는 1933년에 『조선사회경제사』를 간행 발표하였다. 대구의 호적대장 분석을 통하여 그는 한국은 중세사회가 있었지만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유교주의 정신문화만을 강조하여 노동과 물질문명, 산업을 멸시해서 사회가 낙후되었다고 주장함. 따라서 조선은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봄.

모리야는 아시아적 생산 양식론과 결합된 정체성론을 강조함. 조선사회가 삼국시대부터 미숙한 봉건주의를 혼합한 집권적 관료주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거대한 치수사업과 관개시설에는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야 한다. 후진낙후 식민지배의 상징. 제국주의 국가에서 볼 때는 집권적 전제국가도 후진낙후의 상징이 으로 봄. 

조방적 농법은 일정한 면적의 땅에 자본과 노력을 적게 들이고 자연력이나 자연물에 기대어 짓는 농업을 말한다. 이에 비해 집약적 농법은 한, 중, 일의 방식으로 일정한 경작 면적에서 보다 많은 작물을 생산하기 위하여 많은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하는 농업경영방법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말한 아시야적 생산양식은 동아시아가 아닌 조방적 농법의 서남아시아였다. 마르크스는 아시아를 직접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이도 황량 하고 낙후된 지역을 아시아라고 표현 한 것이다. 모리야는 이를 잘못 인용하여 한국에 적용함.

이론은 1960년대 북한학자들에 의해 극복됨.

스즈끼는 정체성론을 주장함. 농업공동체를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표현함. 이들의 식민사관은 열등한 특수성을 강조했으며 왜곡된 사회상 강조했다. 이러한 논리를 통하여 자신들의 제국주의 지배를 합리화 했으며, 식민지지배를 받는 민중에게 패배감과 독립운동약화를 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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