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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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연필/코이노이아

종교의 자유에 대한 단상

슈레딩거의 고양이 2017. 3. 14. 11:48

어디서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이루워지지 않았다. 

피의 역사 속에서 이뤄진 숭고한 결과물이다. 대한민국 공화국 헌법 아래 있다면 

누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  

몰론 가문의 반대로 여전히 목숨을 내놓어야만 하는 분위기 속에 믿음을 지켜가는 분들도 있지만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 받는다. 


종교에 대한 관용의 역사는 생각 보다 길지 않다. 

유럽의 경우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 이후 1618~48년에 일어난 30년 전쟁 등 무수한 피를 흘리고서야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베스트팔렌조약'을 체결하여 개신교 국가들의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었다. 

하지만 발판이었을뿐 세계는 여전히 종교의 관용을 베풀고 있지 않는 곳이 너무나 많다. 

공동체 유지에는 단일교가 더욱 강력하기에 국가의 이름으로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곳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기독교가 국교였을 때도 잔혹한 탄압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때 기독교가 보여준 학살과 폭력의 광기는 

지배세력과 기독교가 결탁했을때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멀어 지는지 적나라 하게 보여 준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제창으로 시작된 십자군은 출정 3 만인 1099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예루살렘 점령 전리품을 챙기는 십자군 병사들을 담은 그림.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조선의 경우 '병인박해(1866)로 8,000 여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가 학살을 당했다. 

병인박해 장면. 이종상 화백 그림. 


ISIS(이슬람국가)가 보이는 반인륜적인 잔혹한 전쟁 범죄는 타종교에 대한 증오의 극단을  보여 준다. 

현대 중국은 예배가 자유롭게 보장 되지 못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제한 받는 것이다. 


복음을 마음 놓고 전하는 자유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타 종교의 자유도 인정해야 한다. 

복음은 자발적인 것이지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면 더이상 복음이 아니다.

한국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는 이면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법과 사회적 분위기이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볼수 없는 다종교 사회이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관용이 종교전쟁 없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소위 '땅밝기' , '단군상 파괴', 타종교 기물 훼손이 

마치 순교자적 행위로 생각하는 자들의 몰지각한 사건이 종종들린다. 

이런한 행동은 복음 전파를 막는 것이지 초대교회 혹은 가까운 조선말 순교자 정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조선에서 복음을 전하다 26세의 나이로 순교한 루비 캔드릭(R.Kendrick) 여선교사가 

보여준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들의 피가 있었기에 마음껏 어디서나 예배 하고 찬양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볼교 등 타종교의 헌신도 우리의 종교의 자유에 큰 역활을 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아무도 알수 없다. 

간절함이란 말로 폭력적인 복음 전파가 이뤄져선 안된다. 

이는 성령의 활동을, 역사의 약속을 깨는 미련한 짓일 뿐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생명을 내놓은 루비캔드릭의 마지막 편지가 마음에 큰 감동을 준다. 

그녀의 묘비에 적힌 글은 "저에게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모두 한국사람들에게 주고 싶어요" 

(사진/옮겨쓴이-박선하)를 읽으며 영혼을 향한 마음이 뜨거워 진다. 

하지만 차분히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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