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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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슈레딩거의 고양이 2017. 4. 16. 00:25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경험을 한 이라면 많은 공감이 되리라 생각 됩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하나님 경험과 비슷합니다. 대구샘터 교회 정용섭 목사님의 글입니다. 많은 공감이 있어 공유 합니다.

"에베레스트 정상"
에베레스트 등반의 최종 목표는 8848미터 정상에 서는 것이다. 정상에 서면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 nothing! 아무 것도 없다. 에베레스트 산의 신령한 주인이 맞아주는 것도 아니다. 정상은 그냥 정상일 뿐이다. 거기서 다른 봉우리를 내려다볼 수는 있겠지만 그 외의 신비로운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정상은 무(無)다.

하나님 경험도 산악인의 에베레스트 정상 경험과 같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상상하거나 기대하는 것이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욕망하던 것들을 만날 수 없다. 혹은 욕망이 투사된 어떤 것들도 만날 수 없다. 돈을 얻는 것도 아니고, 건강을 얻는 것도 아니고, 출세를 보장받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얻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만이 신비롭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 경험은 무(無)경험이나 마찬가지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아무 것도 없기만 한 것일까? 아니다. 거기에는 정상에 서보지 않은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경험이다. 에베레스트만이 에베레스트만의 능력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고유한 선물이다.

하나님 경험에서도 우리는 그런 선물을 받는다. 그 선물은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절대적 사건이다. 하나님을 직면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고유한 선물이다. 그게 뭘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향했을 때, 그런 지향이 완성될 때 주어지는 생명의 실체가 아닐는지. 그런 약속이나 희망이 아닐는지.
정용섭 목사

산에 대해 말하라

지금까지 에베레스트 등반을 비유 삼아 하나님 경험에 대해서 설명했다. 산에 압도당하는 산악인들처럼 목사는 하나님에게 압도당한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었다. 산은 신보다 아주 짧은 획 ‘-’ 하나가 더 붙었을 뿐이다. 어쨌든지 목사는 줄기차게 산을 오르듯이 신에게 가까이 가고, 다시 산을 내려오듯이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 경험은 설교자에게 당위다. 그것 없이는 설교자로 살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설교 행위는 하나님(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뻔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떤 목사들은 하나님을 설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설교 시간 내도록 쏟아낸다고 해서 하나님을 전하는 게 아니다. 대개는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라고 강요하거나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얻게 되는 은혜에 대해서만 전한다. 이는 마치 에베레스트를 올라가본 적이 없이 산행에 대해서 들은풍월만 전하는 사람과 비슷한 형국이다. 이 사람은 청중들에게 산행을 통해서 얻게 되는 유익을 그럴 듯하게 나열한다. 부부가 함께 산행하면 금슬이 좋아진다는 방식으로 우스개를 섞어가면서 솔깃하게 말할 수 있다. 이런 강연에 청중이 아무리 뜨거운 반응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산 자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에베레스트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을 설교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일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설교하면 청중들이 설교를 어려워한다고 말이다. 옳은 말이다. 청중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적거나 없다.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다. 이게 기독교인들의 자기모순이자, 자기 분열적 모습이다. 자기에 대한 관심을 줄여야만 하나님 경험이 가능한데, 끊임없이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이게 회중들의 진면목이라 하더라고 설교자는 회중들의 영적 눈높이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곤란하다. 회중을 핑계로 하나님을 설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압도당한 경험이 없다는 증거다. 내 생각과 경험에 따르면 회중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설교자가 분명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리고 거기에 영적 진정성이 있으면 결국 회중들도 그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 문제는 결국 설교자의 하나님 경험에 어느 정도의 깊이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자기가 마실 영적 샘물의 깊이를 더 깊게 파는 일에 우선 매진해야 할 것이다.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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