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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가리워진 길을 간 그

슈레딩거의 고양이 2017. 6. 24. 15:47

  한국적 팝 발라드의 시작을 연 유재하는 1962년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의 유복한 가정의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 났습니다. 어려서 부터 음악을 좋아 했던 그는 초등학교 때 이미 아코디언, 첼로, 기타를 연주 할 수 있었습니다.. 또래 애들과 다르게 '어니언스'의 노래를 연주하고 부르는게 일상 이었다고 합니다. . 그는 중학교 때 이미 프로급 기타 실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민 끝에 클래식으로 진로를 정했지만 여전히 노래 부르고 곡 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1981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들어 간 그는 정원영, 김종진, 박성식, 장기호, 전태관 등과 교류하며 음악적 역량을 키워 나갑니다. 작곡, 작사, 편곡 뿐만 아니라 다룰 줄 모르는 악기가 없을 정도록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줍니다. 1982년 대학 4학년 때 그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본격적인 프로무대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학교측의 대중음악 분야 아르바이트를 허가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의 활동은 중단 됩니다.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치고 1986년 활동을 음악 활동을 시작 합니다.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속해있던 김현식의 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에 세션으로 들어 갑니다. 정식 멤버는 아니었지만 당시 최고의 음악성을 인정 받은 김현식과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그는 김현식에게 자신의 1집 음반에 수록 될  전 곡을 주었지만 1곡만 선택을 받습니다. 김현식은 후배 뮤지션을 편애하지 않고 챙겨주려 한 곡만 가져간 것 이었는데 그는 이를 오해하고 서운한 마음에 밴드를 활동을 접습니다. 

유재하는 자신의 앨범을 내기위해 베이시스트 조원익을 찾아가 1987년 8월 데뷔 앨범이자 유작 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했습니다. 

 당시 조원익은 그의 곡을 보며 "참 재능있는 친구구나 하며 기대를 크게 걸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그의 앨범은 당대로 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MBC에서는 가창심의 라는 것이 있었는데 담당 PD들 앞에서 피아노를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던 그는 퇴짜를 맞았습니다. 기존의 대중가요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창법과 음악에 당시 음악 관계자들은 이해를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로서는 파격적인 엇박자로 시작 되는 곡을 들으며 박자도 못맞추는 가수로 생각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곡이 전파를 타면서 그만의 음악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밋밋한 반응에 낙담을 많이했고 다음 앨범을 준비하게 됩니다. 

'지난날'로 4위를 할 때 그입니다. 그의 얼굴은 풋풋하면서도 먼가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이는 양가적 느낌이 있습니다. 

 

1987년 11월1일 새벽 3시 술취한 유재하의 친구가 운전하는 차는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오는 택시와 정면 충돌합니다.  시대를 앞서간 가수 유재하는 27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더이상 그의 앨범은 세상에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젊은 천재의 삶은 너무나도 아쉽게 끝나고 맙니다. 그의 비극적 사망 후 그의 음악은 새롭게 조명 받습니다. 그의 동료 가수들은 그의 노래를 다시 부르며 그를 기억합니다. 그가 죽은지 3년 후 같은 날에 김현식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타까운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재하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음반 수익과 성금을 기탁해 음악장학회를 설립합니다. 장학회 주관으로 1989년 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를 개최합니다. 유재하 음악대회를 통해 조규찬, 유희열, 김연우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많은 인재를 발굴해 냅니다. 그는 신승훈, 김동률, 유희열, 그리고 작곡가 김형석 등 많은 음악가들에게 깊은 영향과 끼칩니다. 그의 곡은 많은 가수들에 의해 다시 불려 집니다. 조용필, 이문세, 한영애, 김현식, 박진영, 에픽하이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에 의해 불리워 집니다.  2003년에는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나오며 크게 히트를 칩니다. 경항신문에서 2007년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목록에서 그의 "사랑하기 때문에"가 2위를 차지 했습니다. 그는 명실상부한 한국 대중음악의 큰 자산입니다. 너무나 빠른 세상과의 이별은 한국 음악의 손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그를 이렇게 평합니다.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마스터했으며 작사 작곡 솜씨도 뛰어났다. 악기에 능통한 덕분이었지만 편곡까지 도맡았다는 점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유재하의 1집앨범 곡 리스트 입니다. 모든 곡이 유재하 작사, 유재하 작곡, 유재하 편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의 음악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켓입니다. 

그는 드럼, 기타, 건반 모두 소화했으며 뛰어난 편곡 실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승훈은 ""작사, 작곡, 편곡이 모두 유재하로 표기되어있는 것을 보고 일대 충격을 받았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그는 굉장한 애주가 였습니다. 365일 술을 먹느냐라는 소릴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머감각도 뛰어 났으며 바람둥이라는  동아기획의 대표 김영은 유재하가 "요즘말로 하면 개그맨"이었으며 "또 미남은 아니었지만 바람둥이였다."고 말했다. 김종진은 "재하는 무대 위에서 '꺅' '오빠' 소리 듣는 걸 좋아했던 친구였다"고 기억했다."고 말합니다. 수줍은 모습 이었지만 인정욕구도 강하고 자신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사람이었던거 같습니다.

한강에서 찍은 그의 사진을 보니 참 묘하네요.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기도 하고 또 소년 같은 느낌도 줍니다. 

그의 음악은 항상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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