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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전쟁의 시대 16세기~17세기

슈레딩거의 고양이 2017. 4. 7. 02:00

종교 전쟁의 시대


 중세로 근대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기인 16세기 중반부터 에서 17세기 중반까지는 종교 전쟁의 시기라 할 수 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필두로 1648년 베스트발렌 조약이 체결되기 까지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린다. 중세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인 로마교회의 약화와 타락은 개혁 세력의 등장을 야기 했다. 또한 지방 분권화된 봉건사회의 해체 속에서 중앙집권화를 이뤄가는 세속 권력들도 로마교회로부터 벗어나길 원했다. 그러한 이들에게 종교적 당위성과 명분을 제공해 준 것이 종교개혁이다. 로마교회의 타락에 대한 저항과 개혁으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한 구교와 개혁세력인 신교로 나뉘어 서로 인정하지 않는 극한의 대립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듯 종교 전쟁은 로마교회의 타락에 대한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종교적 이유 뿐 아니라, 중앙 집권화를 이뤄가는 세속권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나뉘어 싸운 것이다. 이러한 종교전쟁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시작으로, 독일과 프랑스의 종교전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의 고찰을 통해서 피를 통해 종교적 관용으로 넘어가는 16~17세기를 알아보고자 한다. 

두 길로 갈라서다-종교개혁

개혁의 여명을 열다 루터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점점 영향력을 잃어 가는 로마교회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한 로마교회는 흑사병, 인구감소, 생산력의 저하, 심해지는 수탈에 이에 일어나는 농민 봉기 등 당면한 시대의 위기를 해결할 적절한 해답은 주지 못한 채 면죄부 판매를 통해 재산을 불리 우며 교권 유지하기에 바빴다. 이렇듯 교황권의 하락은 세속권력의 강화를 뜻하였으며, 점차 로마교회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민국가 성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은 봉건체제가 붕괴되고 부상하는 각 지역의 중앙집권적 국왕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권력과의 다툼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 종교적 명분은 너무나 중요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수많은 제후국 체제였으며,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빈번히 로마교회의 재정적 수탈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황제 카알 5세 또한 친 로마교회적 이여서 독일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할 것 없이 로마교회에 대한 분노가 축적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독일의 신부인 루터가 로마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순수한 종교적 개혁의 열망에서 시작된 루터의 외침은 급속도로 독일에 퍼지기 시작한다. 로마교회의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독일의 현실에 정당한 명분을 준 것이다. 이러한 그의 종교개혁은 독일에서 환영 받았으며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아래 그는 로마 교회와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 세력은 프로테스탄트라 불리 우며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로마교회에 대립의 각을 세운 것이다. 루터는 1520년 3개의 팜플렛을 발표하여 독일의 지배층, 피지배층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낸다. 그는 이후에도 많음 팜플렛을 통해서 오직믿음(sola fide), 오직말씀(sola scripture), 오직은총(sola gratia) 그리고 더불어 만인 사제설(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장)과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받음)를 설파한다. 또한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널리 유포되었으며, 많은 설교자를 통하여 문맹인 피지배층에 마음에도 파고들었다. 또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이라는 국민단위를 설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트의 체계를 세우다 칼뱅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불은 독일에서 시작하여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출신의 칼뱅은 26세의 나이에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여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확고히 세우게 된다. 그는 스위스의 제네바에 개신교의 교리 하에 통치하는 신정왕국을 건설함으로써 종교개혁을 곳곳으로 전파하는 중심에 서게 된다. 이러한 그의 종교개혁은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의 고이센,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영국의 청교도란 이름으로 프로테스탄트를 형성한다. 그의 교리는 예정설이 중심이 되는데, 각자 그 신분에 따라 의무를 이해해야 한다는 다분히 중세적인 루터의 직업관과는 달리, 신에게 구제를 받았다는 ‘확신의 표지’또는 악마와 나날이 싸우면서 신의 영광을 나타낼 ‘신앙의 싸움터’라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칼뱅의 교리는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더욱더 로마교회와의 거리감을 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렇듯 루터와 칼뱅을 통해 종교개혁은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으며, 유럽은 각 지역의  지배 정치세력의 선택에 따라 신교와 구교로 나뉘게 된다.  

교황의 반격- 반동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불길은 거셌지만 중세 1000년을 지배해온 로마교회의 힘도 여전히 유효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결탁으로 교황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해 갔다. 거센 종교개혁 속에서 로마교회도, 스스로 교리를 가다듬고 각종 내부적, 외부적 부패에 대해서 척결하려는 노력을 펼친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통해 교회의 권위를 다시금 확인하고, 프로테스탄트의 확산을 조직적으로  막기 위해 노력한다. 종교재판이 강화 되었으며 에스파냐 군인 출신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1491~1556)의해 1534년에는 예수회가 창설되어 로마교회의 수호를 강화한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신교와 구교의 대립 날을 더욱 날카롭게 한 것이며, 종교적 관용의 시대가 오기까지 수많은 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로마교회는 자신의 기득권과 놓아줄 용의가 전혀 없던 것이다.  

불관용의 시대

슈말칼덴 전쟁

 독일의 루터파 제후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와의 대립하였다. 카알 5세는 힘이 커가는 프랑스, 또한 오스만 투르크와의 관계 속에서 제후들을 상대해야 됐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다른 태도를 취했다. 카알5세는 투르크와의 상황이 호전되자, 강경한 자세를 취한다. 이에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국회에서 루터파는 메란히톤이 편찬한 신앙고백(信仰告白) confession of augsburg 을 제출하고, 그것이 부인되자 다음 해 슈말칼덴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에 대항하였다. 이른바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황제는 교황의 군대와 자금도 지원 받아 비텐베르크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황제는 동맹을 와해시켜 하나의 제국의 하나의 종교로 통일을 하려 했으나 프랑스와의 전쟁, 교황과의 갈등이 재연되어 카를 5세는1548년에 비교적 온건한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협정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로마교회와 프로테스탄트를 만족 시킬 수 없었고 갈등을 지속 시켰다. 이것은 종교적 이유로 시작되었지만 황제권과 제후의 자치권, 황제에 대한 로마교회를 따르는 프랑스의 견제를 보여주는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전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지리한 싸움이 계속되다가 슈말칼덴전쟁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에서 절충적 해결이 이뤄짐으로 일단락된다. 화의를 통해서 지배자가 종교를 지배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 원칙아래 연방국 차원의 자유가 보장 된다. 또한 선교활동을 벌이거나 다른 연방 주민들을 개종시키려 하거나 다른 나라의 동일 종파를 보호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화의는 로마교회 이외의 루터파 교회가 인정된 의의는 있으나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칼뱅파 교회를 비롯한 다른 신교파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여전 종교전쟁의 불씨를 여전히 안고 갔음을 말한다. 

 프랑스 종교전쟁

 일단락 된 종교전쟁의 불씨는 다시 프랑스에서 활활 타오르게 된다. 칼뱅의 교리를 받아들인 프랑스의 위그노의 대두는 프랑스를 대립의 상태로 몰고 갔다. 다양한 사람이 위그노가 되었는데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배에 오랫동안 분개해 오던 남부 지역에서 그 수가 증가 하였다. 1562년에 이르면 칼뱅주의자등은 약 1600만 명이었던 프랑스 전체 인구의 10 내지 20퍼센트를 차지했고. 그 숫자는 매일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귀족의 참여가 많았는데, 이는 프랑스가 정치적으로 분열되었음을 보여 준다. 구교 카톨릭과 신교 위그노로 나뉘어 대립한 것이다. 어떤 한 세력도 다른 한 세력을 완전히 없애버릴 만큼 세력이 강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서로 싸우며 낭트 칙령의 등장까지 8차례나 되는 종교전쟁을 치렀다. 

 프랑스의 앙리 2세(1519~1559)는 대외적으로 제국에 대항해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하기도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탄압했다. 그러던 그가 죽게 되자 새로운 전기를 맡게 된다. 뒤를 이은 프랑수아 2세는 14살의 어린 소년이었고 1년 반 만에 병사한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샤를 9세는 아직 10세에 불과해 기즈 가 형제들과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프랑스의 미약한 왕권, 카톨릭 측인 기즈 가와 카트린, 위그노로 세력이 양분되어 종교전쟁은 서로의 주도권 쟁탈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결국 프랑소아드 기즈는 1562년 3월 1일 예배를 드리던 70명 이상의 개신교도들을 부하를 시켜 죽이게 함으로서 제1차 종교전쟁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전쟁은 촉발되었으며 프랑스는 종교 전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양 세력은 격렬한 정면대결 끝에 다시 지쳐 강화를 맺는 과정을 계속하여 반복했다. 

 제3차 종교전쟁이 1570년에 끝난 후, 잠시 평화가 온 시기에 신교와 구교의 평화를 위해 결혼식이 열린다. 1572년 8월 22일, 결혼식을 위해 신구교도가 모두 파리에 모였다. 하지만 8월 22일 결혼식이 끝나고 돌아오던 위그노의 영수 콜리니는 저격을 당해 팔에 부상을 입었다. 긴장은 고조 되었으며 끝내 카톨릭의 앙리 드 기즈는 파리 시민들과 함께 프로테스탄트를 학살하고 콜리니를 살해했다. 다행히 나바르 왕 앙리는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이것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 학살이다. 

 이렇듯 정치적으로 안정적이 못한 상황에서 카톨릭과 위그노로 나뉜 종교전쟁은 나바르 왕 앙리가 앙리 4세(1589~1610)로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여 부르봉 왕조를 창시하며 끝을 맺는다. 카톨릭 측은 초기에 앙리를 반대 했지만 앙리 4세가 1593년 7월 25일에 생 드니에서 종교 포기식을 거행하므로 그를 받아들였고 샤르트르에서 1594년 2월 27일에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다양한 정치적 수단을 동원하여 카톨릭 측의 복종을 받아갔다. 앙리는 새로운 프랑스를 위해 통합에 힘썼으며 그의 온건정책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모두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며 이런 결과물로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에 따라 카톨릭은 공식 종교로 인정을 받았으며 이와 더불어 위그노의 신앙의 자유도 인정된다.프랑스는 독립되어 있던 봉건 대 귀족들이 전쟁 이후 왕권에 복속되고, 신구교 모두를 한 몸에 체현하고 있는 국왕을 보면서 하나의 프랑스를 국민들이 의식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국민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최후의 결전 - 30년 전쟁

 유럽은 독일과 프랑스 이외에도 영국과 에스파냐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에도  피나는 전쟁을 치룬다. 이러한 전쟁은 각각 1598의 낭트칙령, 1604년 영국과 에스파냐 간의 화평, 그리고 1609년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간의 휴전으로 종교 전쟁은 점차 뜸해지더니 마침내 17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끝은 맺게 된다. 그러나 1618년 또 다시 중요한 새로운 전쟁이 발발했는데 1618-48년 사이에 독일을 무대로 벌어진 전쟁. 최후 최대의 종교인 30년 전쟁이다. 초기에는 종교적 열정 속에서 시작하지만 진행 되면서 왕조, 영토 및 통상에서의 적대관계 등 다양한 이유로 벌인 전쟁이다. 전쟁은 보헤미아에서 카톨릭인 합스부르크가의 통치에 대항한 프로테스탄트의 반란이 일어나며 시작된다. 이에 대해 카톨릭 세력은 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를 중심으로 반격해 들어가 독일전역을 카톨릭화 할 상태까지 만든다. 전쟁은 카톨릭의 승리로 끝나지만, 점점 커져가는 제국의 모습에 주위의 국가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스웨덴이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스웨덴의 침공에는 종교적인 요인도 작용했으나, 더 중요하게는 프랑스와 결속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요인이 작용했다. 독일 제국이 거대한 통일세력이 되는 것을 막으려 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스위덴군은 황제군에 극심한 타격을 입힌다. 하지만 스웨덴이 1632년 전투에서 패하자 1639년에 프랑스는 스웨덴 편에 서서 직접 참전하게 된다. 이렇듯 초기의 신교와 구교의 대립적 양상의 전투는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에스파냐)과, 이를 견제 하려는 세력인 프랑스,신교연합과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팽팽한 접전 속에서 양측은 1648년 10월 24일 베트스 팔렌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긴 30년전쟁은 막을 내린다. 조약을 통해 루터파, 칼뱅파 모두 종교의 자유가 이뤄졌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와 스웨덴은 많은 수혜를 입었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종교의 이름으로 시작된 전쟁은 정치적 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한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많은 전쟁은 먼저 신교 측 이든 구교 측 이든 한쪽으로 힘이 쏠린 것이 아닌, 균형을 이뤘기에 계속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도 황제권이 강하게 미쳤다면, 신교, 구교로 분리 될 수 없었겠지만, 선제후에게도 많은 힘을 보유 하고 있었기에 서로가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또한 전체적으로 로마교회 중심의 구교권 이지만, 주로 귀족이 중심이 된 신교 측의 위그노도 힘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서로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중세가 해체되고 붕건 체제 붕괴되며, 영주의 권력은 국왕 중심으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중앙집권화를 이루며, 권력 투쟁 속에서 구교와 신교라는 선택이 강요 되었으며, 각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구교, 신교로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군주에 따라 종교가 정해지는 모습으로 관용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로는 부족 했으며 다시금 전쟁 속으로 들어간 유럽은 많은 피를 흘리고 서야 서로의 종교를 관용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 하게 된 것이다. 30년 전쟁의 양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의 종교적 차이가 후반에는 무의미 해지고 로마교회를 신봉하는 프랑스가 서로 같은 에스파냐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신교를 후원하여 싸운 것처럼, 종교적 의미가 빠져 나간 것 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중앙집권적 절대주의가 형성되었으며, 지배층은 탈기독교화로 종교가 구교이건 신교이건 중요치 않고 정치적 지배력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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